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단 편집) == 후일담, 여담 == [youtube(jjVf20ulI60)] [youtube(2jji8n5IhQ8)] [youtube(TLrXQd6Rfd0)] 유일하게 체포된 공비 출신인 [[이광수(1965)|이광수]]는 전향 후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군무원|군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정훈]]교육 강사로 각 부대를 돌기도 한다. 학위도 따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 잘 살고 있다. [[http://www.yonhapnews.co.kr/society/2016/09/16/0701000000AKR20160916022500062.HTML?template=7722|기사]] [[https://www.youtube.com/watch?v=3WHcmzF0-z0|이제 만나러 갑니다 255회]]에 이광수를 생포했던 경찰 중 한 명인[* 또다른 한명은 전호구 당시 경장 [youtube(7g_sOuULYcg)]] 최우영이 출연해 들려준 증언과 이광수 본인이 정훈교육 때 한 강연내용을 들어보면 다른 공비들과 혼자 떨어져 행동하다 그 지역 농민 부부에게 발각되었는데 설령 신고를 한다 해도 "설마 그렇게 빨리 군경에게 연락이 가겠어?"라는 생각에 방심하고 남편과 잡담을 나누다 부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북한 기준으로 판단하다보니 외진 산골 민가에까지 전화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생포한 이후의 해프닝 하나를 이야기했는데 붙잡은 이광수를 차에 태워 이송 중 창 밖으로 비친 시내를 보여주며 "보라, 우리 대한민국이 얼마나 자유로운 나라냐." 자랑하는데 이 말을 들은 이광수가 의아해하며 하는 소리가 '''"자유롭다면서 왜 데모를 하나?"'''였다고 한다.[* 이광수 입장에서는 이미 자유로운 나라에서 뭘 더 얻기 위해 투쟁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광수는 데모가 자유롭지 못한 나라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하는 투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각군의 전투복용 포제 [[계급장]] 색이 바뀌었다. 이전부터 미군의 저시인성 계급장을 보고 추진되어오긴 했지만 군에서는 필요성도 실감하지 못했고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아군이 시계가 어두운 시간임에도 총상으로 인한 피해가 컸던 원인이 밝은 색의 계급장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나오게 되자 적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http://mnd9090.tistory.com/1776|국방부 블로그에 올라온 이 글]]에서도 이 사건을 결정적인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사건 직후에 입대한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계급장이 저시인성으로 바뀌었다고 교육받았다 한다. 또한 공비 사건 이후로 전군에 배포된 사고사례 보고 공문에 의하면 계급장으로 인해서 고위 간부부터 차례로 공비에 의해 저격을 당하는 사고사례가 전파되었고, 이를 계급장 교체의 이유로 들었었다. 실제로 계급장 전환 기간으로 3개월 내지 6개월정도의 시간이 주어졌기에 계급장 교체가 불가피한 진급자 위주로 계급장을 교체하고 있었으나, 작전기간 중에 서둘러 저시인성 계급장으로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심지어 모 사단에서는 계급장을 저시인성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무장공비로 간주한다는 엄포까지 추가되면서 급히 계급장과 명찰의 실 한올한올을 검은색 필기구로 즉석에서 칠해 저시인성 계급장처럼 보이게 만들기까지 했었다. 육군과 해병대는 암청록색 바탕에 검정 실 자수(준위는 노랑), 공군은 암청록색 바탕에 암청색(Royal Blue) 자수(준위는 노랑), 해군은 남색 바탕에 소위 이상은 흰색, 준위 이하는 주황색 자수가 표준 배색[* 이전부터 어두운 국방색 바탕에 검정 자수(준위는 노랑)를 쓴 UDT 등 예외가 있다.]으로 바뀌었다. [[파일:attachment/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f0083218_50f4f1dd6dbb6.jpg]][* 계급장도 계급장이지만 잘 훈련 된 특공연대임에도 맨 왼쪽 통신병의 총구가 명확히 아군을 향해 있는게 아쉽다.] 당시 모 특공연대의 사진. 명도와 채도에 손을 본 사진인데도 맨 앞에 앉아있는 육군 대위[* 당시 육해군 및 해병대 전투복의 소위 이상 장교용(준위는 노란 실 사용) 포제 계급장의 표준 배색이었다. 공군은 파란색 바탕색이었다.]의 철모 계급장이 아주 뚜렷하게 보인다. 구형 계급장의 고시인성 문제는 이정도로 심각했었다는 하나의 증거다.[* 이 사진은 후일 영화 '[[아저씨(영화)|아저씨]]'에서 정보사 공작원들의 사진으로 둔갑한다.] 다만 저 사진은 바로 코앞에서 찍은 사진이고, 2차대전 당시 저격수들은 그 먼거리에서 계급장이 보여 그걸로 판단하는게 아니라, 각종 지시하는 동작을 보고 장교 여부를 가려냈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사살 당한 기무사 대령의 경우 공비가 계급장 보고 쏜게 아니라, 본인이 야간에 안보여서 후레쉬 켰다가 참사가 일어났었다. 바로 전 해(1995)에 SBS의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로 벼락 명소가 된 [[정동진역]]의 유행에 오히려 불을 지핀 사건이기도 하다. 안인리/안인진리에서 작전이 집중되었는데 작전 반경에 정동진역이 포함되고 또한 매일같이 공비침투 뉴스에 안인진리와 함께 정동진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바람에 정동진역의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개그맨 [[김대희]]가 [[말년병장|말년]] [[병장]]일 때,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당시 한총련 류의 NL계가 잡고 있었던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도 무장간첩들을 동정하거나,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모습들이 포착되었는데, <동국대학보> 1996년 10월 7일자 '소나기' 란에 "공비아저씨, 죽지 말고 살아서 도망치세요" 등 학생회관 낙서를 전재한 글귀 26개, 박병언 당시 서총련 의장 등 수배 중이던 한총련 간부 2명의 편지가 실렸던 게 경찰에 의해 이적성 혐의가 있다며 수사에 착수했고,[* 다만 '소나기' 란 자체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 도구인 터라 "한총련! 간첩사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라", "국군장병 아저씨들! 무장공비 아저씨들이 세 군데만 내려오면 다 디비지겠다. 똑바로 잡아라" 등 다른 의견들도 수록되었다.] 학보 편집장 및 기자에 국보법상 찬양/고무혐의를 물어 구속하고 나머지 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다만 11월 12일 편집장은 구속 취소, 담당 기자는 구속적부심 수용으로 풀려났다.[*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용역보고서 <국가보안법 적용상에서 나타난 인권 실태> -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2003. p171.]([[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01000239147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6-10-10&officeId=00023&pageNo=47&printNo=23508&publishType=00010|조선일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01700289125005&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10-17&officeId=00028&pageNo=25&printNo=2702&publishType=00010|한겨레]], [[https://www.sarangbang.or.kr/hrdailynews/59100|인권하루소식 #1]], [[https://www.sarangbang.or.kr/hrdailynews/59101|#2]]) 11일에는 서울 모 경찰서 기자실 팩시밀리를 통해 "북한 잠수함 사건은 기관 고장 때문이며, 그 전에 있었던 미군의 대잠 초계훈련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서총련 성명서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01200289122002&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10-12&officeId=00028&pageNo=22&printNo=2698&publishType=00010|전달되자]], 서울지방검찰청 공안2부 측이 이적동조라 보고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01400289127010&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6-10-14&officeId=00028&pageNo=27&printNo=2699&publishType=00010|수사에 착수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0140020910300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0-14&officeId=00020&pageNo=3&printNo=23338&publishType=00010|동아일보 사설]]) 당시 [[PC통신]] 논객이었던 [[김유식]]은 당시 [[하이텔]]에 '잠수함이 수상하다'라는 내용으로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이 이상하다면서 혹시 자작극이 아니냐는 식의 글을 썼다가 경찰 [[보안분실]]로 끌려가 38시간 동안 심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경험을 담은 수기: [[https://gall.dcinside.com/yusik/46|1편]] [[https://gall.dcinside.com/yusik/47|2편]] [[https://gall.dcinside.com/yusik/48|3편]] [[https://gall.dcinside.com/yusik/49|4편]]] 그리고 절대로 심문받은 사실을 알리지 말랬는데도 불구하고 [[PC통신]]에 [[대공분실]] 수기를 올렸다가 정체불명의 전화가 자꾸만 오자 겁이 나서 [[영국]]으로 [[도피유학]]을 갔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1996년 9월에 경찰은 PC통신 내에 '무장공비 자작극론'을 올린 유저들에 대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49863|대대적으로 수사를 시작하여]] 33명을 불구속 입건한 바 있으며, 특히 [[천리안(포털사이트)|천리안]] 등지에 <그들이 무장간첩일까???> 등의 게시글들을 올린 대학원생 윤 모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10100289127009&edtNo=5&printCount=1&publishDate=1996-11-01&officeId=00028&pageNo=27&printNo=2715&publishType=00010|10월 31일에 구속되어]] 12월 18일에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76|징역 1년 6개월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윤 모가 항소하여 1997년 4월 25일에 [[http://www.law.go.kr/%ED%8C%90%EB%A1%80/(96%EA%B3%A0%EB%8B%A811142)|서울지법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검찰이 이에 항소하자 1998년 8월 13일에 이를 기각하고 [[https://www.sarangbang.or.kr/hrdailynews/61536|항소심에서 게시글만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이적표현물 소지 건은 유죄가 적용되어]] 징역 6개월 및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https://www.sarangbang.or.kr/hrdailynews/59173|당시 게시글 전문(인권하루소식 기사)]]) 이 사건이 있던 시기에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등 일부 매체들은 [[공익근무요원]] 전 모가 [[천리안]]에 올린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내용에서 "남한당국이 사건을 조작하여..." 식의 일부 내용만 잘라 발췌하여 PC통신 위험론을 제기했으나 [[http://freespeech.jinbo.net/white/96/ch2.html#2.6.|본문]]을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듯 이는 [[오보]]임이 밝혀져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다. 원문은 그냥 '이 일로 남북의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남북의 권력자들은 이를 또 이용하겠지'라며 [[적대적 공생]]을 지적하는 글이다. 당시 그가 올린 게시물은 해당 사건을 전후해 PC통신 역사상 최다 조회수인 '''3,100여명'''을 기록했다고 한다. [[국방홍보원]]에서 이 사건을 바탕으로 '얼룩진 산하'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 간략하게나마 당시의 전투 진행을 볼 수 있다. 물론 국방홍보원에서 만들어 일부 각색이 들어가 있으며, 예비군 좌학 시간에도 종종 틀어준다. 현재 [[https://tv.dema.mil.kr/web/mov/library/list.do|국방홍보원 홈페이지의 영상자료실]]에서 제목검색을 통해 영상을 찾아 시청할 수 있다. [[파일:attachment/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f0083218_50f4f1f699152.jpg]] 작전 당시 [[강릉시]]는 그야말로 전쟁 분위기였다고 한다. 육/해/공의 거대한 대간첩 작전 수행을 위해 거의 [[계엄령]] 수준으로 군/경의 민간 이동 통제가 이루어짐은 물론 시내에는 온갖 군용차량들이 가득했고, 인근 [[강릉공항]][* 당시에는 민간항공기가 취항하던 군민 겸용 공항이었으나, 현재는 공군 전용 공항이다.]에서는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이착륙으로 소음이 심했다. 또한 멀지 않은 서쪽의 산들에서는 5분이 멀다 하고 수류탄 폭음과 사격소리가 끊임없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사진은 전투경찰과 함께 버스를 검문하는 육군. 고등학교에서는 약 한 달 가량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았다. 또 작전이 한창이던 9월 27일이 [[추석]]이었는데, 어느 지역까지 성묘를 허용해야 하고, 무장간첩이 성묘객 틈 속에 끼어드는 일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가 문제가 되었다. 결국 명절을 맞아 성묘 가는 사람들에게는 [[태극기]]와 [[주민등록증]]을 소지하라는 공지가 내려졌고 강원도 북부 작전지역의 주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성묘하러 가는 진풍경을 연출해야 했다. 당시 강릉 산골 마을마다 살고있는 마을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군인들이 투입되었는데 지키라고 갔다가 주민들의 동정표로 먹을 것도 받고 집에 전화도 하게 해 줬다고 한다. 북한에선 노획당한 잠수함을 돌려줄 것을 뻔뻔하게 요구했지만 당연히 거부당했다. 이 사건에서 무장공비들이 [[M16 소총#s-4.2|북한에서 불법복제된 M16A1]][* 1986년에 [[김일성]], [[김정일]]에게 북한제 [[AK-74]]와 [[M16A1]] 시제품을 선보이는 북한 선전매체 사진이 있다. 해당 항목 참조.]을 사용했는데, 강릉안보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실총을 보면 [[https://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branch=&pn=5&num=98821|근거리 사격에 용이하게 멜빵끈을 특이한 형태로 개조해 놓았다.]] M16 소총을 사용한 이유는 아군으로 위장하기 위함도 있고 [[노획]]한 탄약을 사용하려는 목적도 있다. 여러 증언에 의하면 탄약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인지 한 발씩 끊어서 점사를 주로 했다고 한다. 작전 진행 중인 1996년 10월 1일 [[최덕근 영사 피살 사건|최덕근 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영사가 독극물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최 영사는 [[국가안전기획부]]의 화이트 요원으로 북한의 러시아 무기 밀수를 조사하고 있었고, 시신에 상당한 액수의 돈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으며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독극물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북한이 배후로 의심되었으나 [[레드 마피아]] 관련설도 있는 등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는 사건이다. 2007년 SBS 드라마 [[로비스트]]에서 [[송일국]]의 아버지가 [[육군사관학교]] 출신 대위로 이때 당시 작전에 참여했다가 사망하는 것으로 본격적으로 드라마가 시작된다. 2014년 SBS 드라마 [[쓰리 데이즈]]에서 극중에 '''가상'''으로 묘사된 '1998년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이 사실 미국 군산복합체의 음모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이건 드라마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본]]의 [[가공전기]] 소설과 영화 《[[선전포고(영화)|선전포고]]》는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2004년 제작된 [[프리웨어]] FPS 쿠마\워(Kuma\War) 의 미션 중에 이 사건을 구현한 미션이 있다. 꽤 된 게임이긴 해도 게임 자체가 실제 군사작전을 현실적으로 재구성한 만큼 고증은 수준급으로, 무장공비들이 사복을 입고 AK만이 아니라 M16을 들고 나오는 것까지 고증했다. 단 M16은 제작 영상에만 등장하고 막상 게임에서는 전부 AK를 들고 나온다. 나머지는 무장공비들이 미군 험비를 타고 다니는 것만 빼고 저 위의 집단처형 현장까지 구현해 놓았다. 사건 당시 북한 잠수함을 신고한 택시기사의 일화는 안보의 중요성을 심어주자는 차원에서 [[제7차 교육과정]] 시절인 2001년에 나온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도덕 교과서에 수록된 바 있다. 당시 해안경계를 담당하던 [[제68보병사단|68사단]]은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이 죄다 [[보직해임]]당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11678_19466.html|#]] 보직해임 및 현역부적합전역당한 68사단 지휘관/자의 숫자가 20여명이었다. 홍동진 대위를 오인사격으로 사살하고 만 김 모 상병은 군법에 회부되어 중과실에 의한 상관 살해 혐의로 [[국군교도소]]에 중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이후 [[제68보병사단|68사단]]은 1998년 11월 30일 부로 부대가 해체되었다. 그리고 그 부대를 대신해서 [[제23보병사단]]이 창설되었다. 당시 무장공비와 교전[* 3군단 기무부대장 오영안 대령이 전사한 전투였다.]하다가 팔에 관통상을 입은 3군단 정보분석장교 이종갑 소령([[육군3사관학교|3사]] 16기)[* 과거에 [[HID]]에서 근무하여 [[북파공작원]]들을 대상으로 특수훈련을 시키는 훈련교관을 10년이나 지냈을 정도로 정보/첩보 분야의 베테랑 군인이었다.]은 다음해 중령 진급심사에서 탈락하였다. 이후 부상을 이유로 군문에서 쫒겨난 후 일정한 직업도 없이 하루하루 힘들게 지내다가 [[인력사무소]]에서 중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http://v.media.daum.net/v/20110827023315789|###]]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1/13/102337/|###]] 원래 [[장교단]]이 사관학교 위주로 돌아가긴 하지만 비육사 출신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대우도 받지 못하는 반면 비슷한 상황의 육사 출신은 전례가 없는 특혜를 받는 등 차별이 아주 심하다는걸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다.[[http://cafe.naver.com/ssamsarer/4551|###]] 1980~1990년대 민방위나 예비군 훈련에서는 예비군 지휘관이 [[베트남 전쟁]] 썰을 풀어줬다면, 2000~2010년대는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썰을 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노획한 [[상어급 잠수정|상어급 잠수함]]은 군부에서 조사 후 [[강릉시]] 강동면의 [[강릉통일공원]]에 전시하고 있다. 이 잠수함은 1986년부터 북한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것으로, 최고속도는 8kn(시속 약 14.8km) 정도였다고 하며, 들어가면 내부공간이 엄청나게 좁을 뿐 아니라 보존관리가 잘 안 되어 있어 악취가 진동한다. 침실은 무장공비들이 보안 유지를 위해 고의적으로 폭파 및 방화했기에 그을음이 가득하다. 비좁은 내부 때문에 입장객은 비치된 [[안전모]] 착용 후 입장 및 반납이 의무이다. 밤 10시 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하던 학생이 군인들의 검문에 걸려 [[http://www.ppomppu.co.kr/zboard/view.php?id=freeboard&no=1637902|연행된 일이 있었다]]. [[속초시|속초]]와 [[고성군(강원도)|고성군]]을 잇는 검문소에서 공비로 오해받은 것이다. 가방 속 [[교과서]]를 보여주려다가 포승줄에 묶였다고 한다. 채널 A에서 방송되고 있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중인 탈북여성 최송죽이 밝힌 바에 의하면 자신이 북에서 살던 시절에 침투공비중 한 사람이 본인의 옆집에 살았던 이웃사람 이었다는 것을 밝혀서 출연자들을 놀라게 했다. 누구인지는 방송에서는 밝히지 않았는데 아마도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무장공비와의 교전이 한창이었던 9월 25일부터 30일까지 5박 6일간 [[청남대]]로 연휴를 떠났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93000099102009&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6-09-30&officeId=00009&pageNo=2&printNo=9562&publishType=0001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